CRITICS

아티스트 프로젝트 Artist Project Ⅰ․Ⅱ․Ⅲ - 김영준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이라할 때, 우리는 단순히 과거와 거리를 두는 시간만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은 현대의 문화적 맥락에 미술이라는 사건들의 총체이다. 우리는 시간을 상상하거나 기억할 수 없다.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또는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개념들을 차용해 와야만 한다. 그 중에 가장 빈번히 차용해 온 것이 공간개념이며 사건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시간을 공간과 사건에 견주어 상상한다. 시간의 이미지는 공간에서 펼쳐진 사건의 이미지이다. 때문에 현대라는 시간은 공간(개념)의 도움 없이 이해하기 힘들다. 어떤 공간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의 이미지와 그 순서의 배열은 시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과거와 구별되는 (미술)사건들의 이미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과거와의 구별은 다양한 맥락으로 드러나는데, 이른바 우리는 그것을 주저함 없이 현대미술의 특징으로 이해한다. 다양한 맥락 속에 두드러진 것, 그러니까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라면 ‘확장’을 통해 얻은 ‘다양성’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현대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미술의 확장과 다양성이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확장과 다양성’이 마치 그저 ‘좋은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과학의 발달은 인간문명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수많은 부작용을 동반해야 했다. 그래서 얻은 교훈은 매우 가치 있다. ‘조화’나 ‘균형’의 개념을 떠올리면서 과학의 이기(利己)가 가져온 부작용을 회복하고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전환시키고자하는 노력의 필연성을 학습하게 되었다. 과학은 자연을 지배할 수 없고, 자연은 과학을 따돌릴 수 없다. 현대미술의 ‘확장’과 ‘다양성’은 이제 ‘조화’와 ‘균형’을 통해 바른길을 가야하는 사명을 함께 부여받았다. 이 바른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부산현대미술관의 탄생은 바로 그 바른길을 찾아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이 험난한 국면에서 2018년 6월 16일 개관기념전을 열었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자연환경은 생태보존지역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미술관은 풍성한 자연 속에서 첨단의 미술 사건들이 어떻게 조화와 균형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특히 개관전 『아티스트 프로젝트 Ⅰ,Ⅱ,Ⅲ』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통한 미술이 어떻게 확장되었으며, 확장을 통해 파생된 부작용과 모순을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성찰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과학은 역사적으로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감과 모티브를 제공했다. 르네상스시대의 원근법이 수학을 이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광학과 기계기술의 발달이 카메라를 발명케 했다는 것을 예시할 수 있다. 카메라를 통한 사진술은 아티스트들은 물론이거니와 미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시각성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 오늘날의 첨단과학은 첨단미술의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문화의 다양한 가치를 폐기하게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노동력이 기계에 대체되는 현상처럼 인간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과학의 이름으로 기계들이 점령한다. 인간의 소외는 이제 새로운 자연을 갈망하게 한다.

개관전 <아티스트 프로젝트>는 3명의 작가가 각각의 개인전을 펼치는 장이다. 3명의 작가는 현재 미디어 설치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할만한 입지를 갖추었다. 각각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 다른 동기들로 시작하였지만 그들은 ‘빛’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갖는다. 프로젝트Ⅰ의 작가 전준호의 작업에서는 인공조명과 자연채광이 작품의 메시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다. 프로젝트 Ⅱ의 정혜련의 작업에서 ‘LED 조명’은 모든 것의 은유이다. 환상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질주의 조명 라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낙동강이라는 자연을 욕망하면서 달려간다. 프로젝트 Ⅲ의 강애란의 작업은 빛의 요소로 대체된 지식, 인공 광선으로 반짝이는 모조의 책을 구현하면서 지금 우리의 정보와 지식체계를 환기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빛’은 작품을 구성하거나 맥락을 구조화하는 모티브일 뿐이다. 세 작가의 작품들은 각각 궁극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1의 풍경 : 아티스트 프로젝트 Ⅱ
우리가 풍경을 바라볼 때, 그 풍경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스펙터클의 경험이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산위에서 바라보는 도시 야경의 불빛, 차창 밖에서 춤추는 도심 간판조명들......우리는 스펙터클 풍경에 도취된다. 사실 근대적 시각경험이라는 것은 ‘보는 행위’를 통해 ‘대상화’작용을 하는 것이다. 고쳐 말하면 시각대상에 반응하는 ‘나’를 반추한다. 그럼에도 스펙터클한 풍경에의 도취는 현실의 시공간을 망각하게 하는 환상의 효과가 있다. 어릴 때 장난감으로 즐겼던 만화경(kaleidoscope)을 들여다봤을 때의 경험은 사실 대상을 통한 ‘자각’이 아니라 오히려 황홀경으로 매몰되었던 경험을 떠 올릴 수 있다. 어쩌면 이콘(Icon)을 보면서 무한한 신앙적 황홀경으로 빠져들었던 중세 기도교인들의 경험과 유사할지 모른다.

정혜련의 작품 <-1의 풍경>의 경험은 제일 먼저 환상적인 스펙터클에 도취이다. 그리고 낯선 사물들에 대한 호기심이 뒤따른다. 우선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LED조명이 다양한 색들로 변주하며 어디론가 질주하는 선형의 자유곡선체이다. 우리 머리 위에서 마치 무중력상태로 연출되는 LED조명은 전시장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등고선형의 구조물과 그 위에 조그만 탑(솟대)이 보인다. 또 다른 곳에는 조금 다른 모양의 탑이, 그리고 반투명의 아크릴 창이 여럿 부착된 원기둥의 구조물을 볼 수 있다. 모두 LED 광원이나 인공조명에 연루된 어떤 오브제들이다. 이 풍경은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경한 사물들로 구성되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프로그램과 다양한 기성의 재료들로 만들어진 조합체들의 연출이지만 우리의 시각은 추상적인 감성으로 반응한다.

작가는 부산현대미술관 개관전 출품의뢰를 받고 미술관의 환경을 연구하고 조사했다. 을숙도라는 낙동강 하구에 삼각주로 형성된 섬, 그리고 인근 지역민들의 문화를 새롭게 관찰하였다. 그렇게 얻어낸 정보들을 자신의 언어로 재편하고 미술에 접합시켰다. 예로부터 보수적인 지역민의 성향은 외래 종교보다는 전통 유교적 환경을 배경으로 한 민간신앙이 여전히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작품 오브제 중 탑의 모양들과 건축적 구조물들은 미술관 인근지역 당산제(堂山祭)에서 목격한 경험들이다. 이 기묘한 시각 경험은 이 지역에 독특한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인지하게 한다. 그러니까 작가가 연출한 선형의 빛줄기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은유하였다. 강은 다시금 인간 삶의 터전임을 재고하게 한다. <-1의 풍경>에서 ‘–1’은 마치 우리가 강의 수면 밑을 상기하게 한다거나 지나간 시간들을 유추하게 한다. 정혜련이 연출한 환상적인 스펙터클은 시간과 공간에 연루된 인간 문화의 기원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의미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정혜련의 작업이 우리의 눈을 현혹하고 현실의 시공간감의 상실을 유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현대과학기술로 프로그램된 LED의 강줄기가 대자연 낙동강을 욕망하고 문화의 기원을 은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지 능력과 감각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상식은 여기에서 생산되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 왔다. 하지만 그 차원과 일상 범주 너머의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 우리의 상식이 생산되고 보편성이 획득되는 차원은 반성의 대상이 된다. 2018년 부산현대미술관 개관전 아티스트 프로젝트는 각각의 전시가 각각의 맥락에서 우리의 차원과 범주를 환기시킨다. 이것은 성찰이며, 이른바 컨템퍼러리 미술이 목표하는 또 하나의 지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Artist Project Ⅰ․Ⅱ․Ⅲ - Kim Young-joon (Curator, Museum of Contemporary Art, Busan)

We do not understand the phrase Contemporary Art merely in terms of a time as distinct from that of the past. Rather, it refers to the entirety of artistic events within a modern cultural context. Indeed, we are not properly able to conceptualize time. In order to do so, we must borrow from numerous other ideas, the most frequent of which are spatial, or linked with imagery of past events, so that we generally perceive time within these terms. Our understanding of time relies upon imagery of particular events which occurred in particular places, and it is hard to appreciate contemporary time without the assistance of such images of events, and the sequential order in which they took place within a particular space.

Thus, contemporary art can be apprehended through images of (artistic) events that are obviously distinct from those of the past. Such differentiations from the past appear in a variety of contexts, all of which we perceive as being characteristics of contemporary art, one of the most readily identifiable being “diversity” achieved through the “expansion” of artistic boundaries. I wish to pay particular attention here to the expansion and diversity of art brought about by the development of modern technology. A mistake we are often apt to make is the assumption that “expansion and diversity” are inherently good. As we are all aware, advances in science have inarguably elevated human civilization to a higher level, but there have been numerous unforeseen consequences. The lessons we learn from this are invaluable. We have learned of the necessity to remember principles of “harmony” and “balance”, to deal with the repercussions of the supposed conveniences science brings, to turn adversities into positives. Science cannot rule over nature, and nature cannot escape science. Thus, the “expansion” and “diversity” of contemporary art must be determined to follow a path of “harmony” and “balance”. We do not yet know how to find or stay upon the right course. But, the birth of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Busan (MoCA Busan) began with this mission to seek out the best way forward, and in the midst of this challenge, the opening exhibitions began on June 16th, 2018.

The location of the museum, surrounded by an ecological conservation area, can be understood in this context. It was crucial that the museum demonstrate how high-tech arts events can coexist in harmony and balance with a flourishing natural environment. The opening exhibition, Artist Project Ⅰ,Ⅱ,Ⅲ, illustrates this balance especially well; how the arts have expanded through the development of science and technology and also how and when art must reflect the consequences and repercussions of that expansion.

Science has historically provided rich inspiration and motivation for artists. Consider the mathematics involved in Renaissance era perspective, for example, or the development of optics and mechanical technology which allowed for the invention of the camera. Photography has revolutionized the perception of both artists and viewers of art. Today’s advanced technology is a crucial element of modern art, yet advances in science and technology have also led to the destruction of diverse human cultural values. As humans are replaced by machines in the world, technology is taking over in the name of science what it means to be human, and this human alienation results in our longing for a new nature and purpose.

In the opening exhibition, Artist Project, three artists have each created their own individual exhibitions. All three artists are well-established and representative of Korean media installation art. Although each is inspired by completely different motives, it is interesting that they have all gravitated towards the same medium - light. In the work of Project I artist, Jeon Joon-ho, artificial lighting and natural lighting both play crucial roles in delivering his artistic message. In Jung Hye-ryun’s work for Project II, “LED lighting” is used metaphorically. The fantastic spectacle of the lively illuminated lights flow in ironic longing to share the nature of the Nakdong River. In Project III, Kang Airan's work recalls our modern information and knowledge systems, using fake books illuminated with artificial daylight so that knowledge becomes displaced by elements of light. For each artist, however, “light” is simply a means to give their works structure or context. Each seeks to communicate their own fundamental truth.

Landscape of –1: Artist Project Ⅱ
When we look at a landscape, provided we do not bestow upon the objects within it any special meaning, it is the experience of spectacle. The countless stars in the night sky, city lights in the late evening seen from the mountains, illuminated billboards dancing by outside the car windows; we are carried away by the spectacle on view. In fact, the modern visual experience is to “objectify” through the “act of seeing”. In other words, it is to look back on the “I” that responds to visual stimuli. Nevertheless, the highs of spectacular views have the effect of fantasy, allowing one to forget real time and space. The experience of looking through a toy kaleidoscope as a child might recall the feeling; the joy of becoming lost rather than awareness through objects. It might be akin to the experiences of medieval Protestants who fell into infinite religious ecstasies while gazing upon their icons.

The immediate experience of Jung Hye-ryun’s work, Landscape of –1, is to be carried away by the fantastic spectacle, and then what follows is curiosity about its peculiarities. Initially, what we see is a linear, free-curving structure, apparently running somewhere, displayed by LED lighting of various colours. The stream of LED lights, which seems to float in zero gravity over our heads, stretches throughout the space of the showroom. Next, we see a structure resembling the contour lines on a map, with a small tower (sotdae) standing atop. Elsewhere, there is another tower of a different shape and a large cylindrical structure with several translucent acrylic windows. Each object involves some kind of LED or artificial light source. This is a landscape made up of strange objects that we have never before encountered. Despite the ensemble produced by the meticulously planned design and the relatively conventional materials, viewers nonetheless respond to the abstract emotional power of the scene.

After the artist was commissioned to submit work for the opening exhibition of MoCA Busan, she began to research the area surrounding the museum. She examined Eulsukdo Island, the Nakdong River delta and estuary, and the culture of the local residents, all with renewed vision, and realigned the information she gathered into her own artistic language. She discovered that the conservative locals have held, since long ago, stronger faith in folk beliefs based on traditional Confucianism than in the other common foreign religions, and this became an important motif in her work. The objects in her artworks, the shapes of the pagodas and architectural structures, derive from her experiences of the rituals of 'Dansanje' which she witnessed in the local area around the museum. This uncommon visual experience brought a new awareness of the unique times and spaces of the region. Thus, the linear beam of light created by the artist is a metaphor for the flow of the Nakdong River, and the river reminds us once again that it is home to human life.

In Landscape of –1, the “-1” might prompt thoughts of being beneath the surface of the river or perhaps suggest the passage of time. The fantastic spectacle produced by Jung Hye-ryun can be said to derive meaning from a recognition of the origins of human culture in time and space. Although her work may have blinded our eyes and led to the loss of our sense of real time and space, we comprehend that the stream of high-tech, pre-programmed LEDs, in fact, yearns to be at one with Mother Nature, the Nakdong River, and harks back to the origins of culture.

In all respects, our cognitive abilities and senses work within the predictable boundaries of our daily lives. Our sense of reality is formed in this way. It is universal, defining our absolute values. However, as soon as our experiences move beyond our normal boundaries and classifications, the context in which our reality exists and its universality become the subject of speculation. In the opening exhibition of MoCA Busan in 2018, Artist Project, each artist attempts to redefine our reality within their own personal context; an aim that surely one can identify as being another defining quality of contemporary art.

1) Sotdae(솟대) : a long platform built for the purpose of civil belief or celebration (a summary, quoted from Internet Doosan Encyclopedia)
2) Dansanje(당산제) : a community rite to pray to village guardian Dansanshin for the prosperity and peace of the village. (a summary, quoted from Internet Korean National Culture Encyclopedia)

경험적 한계의 공간 [Abstract Time] - 김미진(홍익대 미술대학원교수, 기획& 비평)

정혜련의 은 나무와 LED가 하나의 선이 되어 공간을 자유자재로 드로잉하고 가죽 끈을 덮어쓴 거대한 원형 선풍기가 중심에서 돌아가는 추상조각설치작업이다.

그의 지난 작품에서는 인간 욕망의 해소장소인 기념탑이나 놀이공원을 버려진 나무와 가죽 재료를 사용해 역사적 환상 안에서의 덧없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번 작업은 이전으로 부터 롤러코스트의 뼈대로서 시각적 유희만 형태로 취하며 시각예술자체의 근원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실험하면서 탐구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딱딱한 성질의 자작나무를 오랜 시간동안 물에 적시고 변형시켜 구부러지는 선의 형태를 만든다. 이 부분은 LED와 합쳐져 세련되고 풍부한 감각을 내뿜는 모듈이 되어 전시공간상황에 따라 나사로 롤러코스트 유선 형태와도 같은 자유자재의 형태로 조립된다. 나무 뒷면에 붙인 네온과 함께 바닥과 천장에는 형태가 만들어낸 드로잉 그림자가 생성되고 진짜와 허상공간이 서로 접속되면서 입체적인 몽타주가 탄생된다.

이 작업은 그전의 정치적이고 사회제도의 비판적 요소는 사라지고, 대신 다양하고 복합적인 시 공간이 함께 경험되는 서사적 형이상학적 요소가 자리 잡는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구조를 형식화 시키는 작품으로부터 카오스와 분산을 통해 시선과 감각은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게 된다. 켜켜로 겹쳐진 자작나무는 부드러운 베이지 톤으로 질료자체가 주는 편안함을 앞세우고, 배후의 LED 컬러는 수시로 색이 바뀌며 작품은 어느 방향에서나 다른 형태를 갖는다. 작업 중앙에는 가는 가죽으로 잘린 끈들이 무더기로 뭉쳐진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가는 모양대로 비정형적인 형태를 만들며 흩날린다. 이것은 지적문명의 배설물처럼 보이며 불규칙과 불편함의 속성을 생성하고 있다. 정혜련은 나무, 가죽, LED, 쇠, 전기, 바람 등의 속성이 다른 질료가 갖는 형태의 본질을 조금씩 변형시켜 이질적인 산물의 편차를 둔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내는 바닥과 벽면에 그림자로 드로잉된 형태는 우연을 만들어내는 요소인 빛, 바람의 파동이란 비 물질이 지속적으로 침투하여 한 순간의 시공간도 고정되지 않게 교란시킨다. 조각이 신체와 이를 둘러싼 공간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오고 있는 연장선상에서 정혜련의 작업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거대한 네트워크 시스템 안에 있는 이 시대 인간들의 복잡성을 은유적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 시대의 자연, 기계,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는 개별신체의 경험을 시각화시키고자 한다. 나무(자연)와 LED(문명)의 질료는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서로간이 일체가 되어 물리적 변형 안에서 우연조차 조절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생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기존 외관 형태들이 만든 질서는 해체되고 다시 재조합되고 덧붙여져 낯선 문맥의 작업이 탄생된 것이다. 배치된 서로 다른 감각들이 생성해 내는 구조전체는 규정되어지지 않은 비정형적인 형태의 촉각적이고 시지각적인 감각과 함께 우주근원의 빅뱅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에 따른 존재에 대한 질문을 압축해서 던지고 있다. 은 이 시대정신과 역사적 미술사의 맥락이 서로 얽히고 받쳐주며 미까지 규명한 예술작품으로 앞으로도 많은 비평을 촉발시킬 것이다. 시대적 구조를 예술 내적으로 연결시키며 새로운 예술형태를 실험하는 작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한다.

Abstract Time (Space of Empirical Limit) - Professor Kim, Mi-jin

Hye-ryeon Jeong's [Abstract Time] is an abstract piece-installed work where a large circular fan is working in the center and wood and LED became a single line used to draw space quite freely.

In the previous work, she expressed the transitory reality through places of solving human desires, like a monument or an amusement park, by using such materials as wood and abandoned leather. In the present work of hers, however, she intends to experiment with and explore fundamental and profound contents of visual arts while making a visual amusement form with roller coaster frames.

When it comes to the process of her work, she put stiff-natured birch in water for a long time and made it a flexible line through transformation. Then, this wood is combined with LED, further being modules expressing an abundant and sophisticated sense. Then, they are assembled quite freely like the form of roller coaster rails with screws, depending on circumstances of exhibition space. In addition to the neon signs attached to the back of wood, drawing shadows are created by these forms on the floor and from the ceiling, and when virtual space and real space are connected to each other, a three-dimensional montage is created.

Through this work, her critical elements against the political and social institutions are gone, which she showed through her previous works, and narrative and metaphysical elements are positioned instead, which viewers can experience along with various and complex spaces. As a work formatting all the structures she has shown so far, the present work of hers make viewers' eyes and senses go beyond the empirical limitations through chaos and dispersion. Since the layered birch used for this work is beige-toned, it features comfort given by the material itself, and the background LED color changes frequently, making the work look different from different directions.

In the center of her work, a fan is slowly working, and around the fan, a pile of thin leather straps are fluttering in an irregular shape as the fan works. It looks like an excrement of the intellectual civilization, while creating the attribute of irregularity and discomfort. Especially, she leads deviations of heterogeneous objects by gradually transforming the essence of materials with different attributes, such as wood, leather, LED, iron, electricity and wind.

Then, she drew shadows on the floor and walls with these materials, and by constantly infiltrating non-materials into the shadow, such as waves of light and wind which are elements making coincidence, so that space time may be disturbed not to be fixed even for a moment. As an extension of constantly exploring the human body and its surrounding space, these pieces in her work express all the complexity of humans living in an enormous network system of digital technology of this generation with metaphorical symbols.

She tries o visualize individual human bodies' experiences while interchanging with nature, machinery and humans in the present time. The materials of wood (nature) and LED (civilization) are not divided in a dichotomy-like idea of modernism but combined into one, creating new senses while controlling even coincidence in physical transformation. All the orders made the existing exterior forms are dismantled and reassembled and added, consequently giving a birth to this work of hers in an unfamiliar context.

The entire structure is created by the arranged senses different from one another, and it compresses and throws a question about existences led by time from Big Ban, the source of universe, to the present time, along with tactual and visual and perceptual senses in non-regular forms. As an art work where the spirit of the times and contexts in the history of arts are tangled and supported and even beauty is verified at the same time, [Abstract Time] will bring about many criticisms in the future. We look forward to her next move to experiment with new artistic forms while connecting the structure of time with internal techniques of art.

공간 속 분열과 반복 아래 투영된 삶의 불확실성 - 홍경한(미술평론가)

1. 롯데백화점 월드점 에비뉴엘에서 선보인 <연쇄적 가능성 Serial Possibility–Planet>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 작가 정혜련은 자신의 삶을 대입한 시간의 무화(無化)와 존재의 불확실성(不確實性)을 보여준다. 작은 부품의 집합인 모듈(module)을 통해 구동되는 일련의 작품들은 스스로 존재를 공간 속에서 무화하고, 무의 본질인 무화는 그것을 지탱하는 존재자 안에서 시공을 재생산하며 존재자를 더욱 존재자로 남게 만든다. 이러한 철학적 개념은 감각적인 여백이 물씬한 공간드로잉으로 확장된다. 불특정적이고 가변적인 장소에 펼쳐지는 이들 공간드로잉은 작가와 우리가 동시에 살아가는 세상의 구조에 대한 불확연한 연계성을 의미한다.
이들 작품은 2000년대 이후 선보인 작품들 대비 온전한 낯섦을 불러오진 않지만 진부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증명한다. 어쩌면 포스트디지털 세대가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에서 꾸준히 다뤄온 형식이지만 외면하기 어려운 의제를 안고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다. 이는 시각적 변동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다양한 기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언급된 기의란 바로 일정한 제도와 범주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네 자화상 또는 인간 사회의 여러 층위(혼잡하고 불명확하며 혼돈스러운)의 투영이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우선 눈에 띄는 건 정교한 장치의 무한한 움직임이다. 공간 곳곳에 머문 채 얽히고설키며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이 수공예적장치들은 구동하는 속도와 크기가 저마다 달라, 혼돈 속 규칙부터 읽도록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제한된 동선을 그리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불규칙한 형상을 한 여러 작품들(드로잉) 사이에서 시각언어가 지닌 내러티브를 드러낸다. 이 중 공간을 유영하는 비정형의 곡선들(공간 입체드로잉)은 하나같이 의미와 상징체로 남을 뿐, 세상사가 그러하듯 딱히 정의되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의 작품 속엔 어떤 가시적인 메시지라기 보단, 작가의 내면에 똬리 튼 기억과 의식, 삶의 단락이 관람자와 작품 간 매개인 동정기호에 의해 순차 혹은 교차 교류됨을 지정한다는 사실에 있다.

반면 전시장 구석 박스형태의 공간에 놓인 한 작품은 광확산수지(발광 플라스틱)에 의한 강렬한 빛과 어둠 속 시각물이 교차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여운을 통해 세상에 드리워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되묻는다. 아니, 연쇄적 가능성’(Serial possibility)이란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확장하며 소급되는 유무형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건 곧 일차적으로 작가자신이지만 누구도 대치될 수 있다. 형식상 이 작품은 빛과 리듬이라는 기표로 부상하지만 공간이라는 불확실성, 무한변주가 가능한 공간이기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더욱 짙고 강하게, 그러면서 느낌으로 정의되는 알 수 없는 여백이 훨씬 두드러진다.
정혜련의 작업에 대해 과거 어느 글에서도 논한바있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일종의 건축이되 움직이는 건축이고, 동적이지만 우리가 거주하는 고착된 공간이라는 프레임에 놓여 있다. 나무, 발광 플라스틱, 천 조각, 모래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물리적 실체이지만 그것은 공간 속에서 기억을 재생하고 상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가상의 문으로 기능한다. 물론 우린 그의 작품을 보며 그 문을 실험적 알고리즘(상실, 복원, 환유, 재구성 등등)을 열람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작가 자신의 기억 속 형태들을 훑는, 다면적이고 추상적인 드로잉이 어떻게 동시대미술의 언어로 구술되는지 확인하게 한다.

허나 공간드로잉 연작에선 (일정한 속도를 지닌 채 구동하는 이것들은) 평범함 혹은 낯익음을 현실과 다른 세계를 엿보게 하여, 이성이 아닌 감성과 상상의 무대로 방향을 옮기기도 한다. 흡사 뫼비우스의 띠 마냥 돌고 돌아 교차하며 제자리를 찾는 곡선의 조형 요소를 통해 잃어버린 세계, 잊어버린 장소와 기억으로 인도한다는 것, 그게 매력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그의 작업은 고정적이면서 역설적으로 흐름이 존재하는 탈시간성, 공간에 고착되어 있지만 되레 탈공간성을 지향한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매우 느린 사유를 전제로 하며, 실제로도 그의 작품들은 눈에 띄게 동적이지는 않다.
흥미로운 건 작가의 작업 태도 역시 시각결과물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필자의 판단에)친근하게 수동적이고 정겹게 느릿하다. 구두 표현조차 차분하듯 작품 역시 낮은음에 머문다.(그의 작업에서 확연한 속도감을 체감할 수 있는 건 드물다. 대부분 재지 못하고 느림으로 구동한다.) 작품이란 작가 자아의 또 다른 형태임을 각인시키듯 작가 자체가 시끌벅적하지도 부단한 욕망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아마도 그건 작가 자신의 삶이 그렇게 전개되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작가는 자신의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작업이 위치하는 지점은 매우 고요하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의지가 나를 작가라는 위치에 두지 않았다. 그저 아침에 먹는 음식이나, 선택되어진 옷가지들 그것들을 먹고 입는 행위를 하듯 내게 작업은 그런 존재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기에 운명이나 숙명과 같은 거창한 단어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껏 이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인연이었음에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렇게 밋밋한 태도로 무슨 작가의 길을 갈 수 있느냐고 물어 볼 수 있겠지만 난 이 수동적, 반복적 삶에 매우 만족하고 집중할 수 있다. 그것이 나인 것이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수동적, 반복적 삶에 매우 만족하고 집중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여기엔 과거 선보인 개인의 감성을 통한 사회 구조와 문제를 비트는 작업(국회의사당이 등장하는 등의)은 다소 열외로 한다. 2007년부터 2010년경 선보인 (부산비엔날레 본전시에도 출품된)<놀이공원>과 같이 기억의 잔상에 천착한 작업들도 일단은 배제된다. 대신 근래에 이르러 정혜련의 작업 방향은 시간과 공간의 유영에 보다 몰입하며, 나와 타자 간 심상의 교류나 존재본질에 대한 탐구와 감각체계 속에 흩어져있는 감성의 본원으로서의 미학이 뚜렷하다. 즉, 2000년대 중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억과 현실-내면-느낌이나 감성-무의식으로의 전환 또는 변화가 이뤄졌다면, 후기로 갈수록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나와 삶에 연관된 내외적 환경과 시간 및 공간에 관한 해석이 명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근작에 있어 또 하나 변화된 것을 꼽으라면 다름 아닌 설명의 배제이다. 더 이상 그의 작업에서 강렬하고 단도직입적인 언어는 엿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리 곁에 존재하며 공유되는 모든 감정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립될 수 있는지를 극적이며 유희적인 상상력으로 보여주고 시공을 증폭하는 로우테크놀러지적 장치를 통해 관람자들의 각자 다른 기억까지 교합시켜 끊임없이 새로운 조형을 구축한다. 이는 “(근작의 경우)무질서와 불규칙성을 부여함으로써 단선적인 메시지 전달을 회피하고 의미생성의 층을 두텁게 만들고 있다.”는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이 말한 것처럼 의미생성의 무한성, 우연성에 방점을 두고 있음을 가리킨다.
오늘날 정혜련의 작업은 철학적 인간학, 즉 인간의 자기규정에 대한 불확실성에 오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무엇인가’를 되묻고, ‘일탈 공간의 가속화’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식에서 빌려온 환경에 의존한 채 작동하고, 주어진 물질들, 환경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 그리고 그것들로 그려낼 수 있는 이미지들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우연적 움직임들에 주목하고 있음”을 일러준다. 이것은 어떤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움직이고 변화해 가는 모든 것들에 의해 증식 가능하고 확장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자, 파편화한 기억의 조각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집약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전시에도 이전 사회적 문제의식의 노골적 표현이나 인간 소외, 정치적 문제와 같은 즉시적 드러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보단 삶의 섬세한 결을 들여다보라 권한다. 자신의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기억의 기제를 시각언어로 치환하고, 감각으로 수용한 다양한 의미들을 무의식적으로 시공 아래 표제화 하여 사유를 공유하고 질문하고 답을 끌어내길 주문한다. 이 전시에서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모든 작품들이 그렇게 일부 정적인 움직임으로, 일부는 침묵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도 반드시 그래야만 짚을 수 있는 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혜련의 작업은 더 이상 논리와 판단, 이성과 수학적이지 않은 채 감각체계 속에 흩뿌려진 반이성적인 차원에서의 기억을 불러 모으고 삶의 움직임, 분열, 조합을 재생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쇄적 가능성 Serial Possibility–Planet> 전에 출품된 정혜련의 작업은 이처럼 끊임없는 변화의 상태를 보여주는 열려있는 상태의 것이며, 동시에 그의 작품 역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삶의 연속선처럼 리듬감 있게 변화하고 움직이는 기호로 기능한다. 이는 어쩌면 작가에게 있어 살아 있는 것, 관계된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새롭게 사유하고 공존하며 공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틀리지 않다. “현실에 놓인 모든 것들은 서로에 의해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지니며 각각은 끊임없는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있다. 발생된 반응들은 에너지가 되어 삶을 지속시키고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이 그것을 증거 한다.

2014 유리상자 Ver.5 - 봉산문화회관 큐레이터 정종구

조각을 전공한 정혜련(1977生)의 설치작품 “연쇄적 가능성 Serial possibility”은 작가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세계’의 풍경을 장소 특정적으로 구체화하여 선과 면으로 그려내고, 이를 입체화하는 일종의 ‘드로잉 조각’입니다. 작가는 물질의 생성과 변화, 세계구축에 관한 개체간의 자율적이고 연속적인 상호작용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으며, 물질세계와 비가시적인 정신세계를 포함하는 세계의 동작원리를 시각화하는 유기체적 ‘가능태可能態’를 조형화합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 자신의 신체행위가 스며든 낯선 ‘가능태’를 사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상자 공간 속에서 찾아내려는 작가의 유희적 탐구로부터 설계되었습니다. 우선, 이 설계는 아무런 일없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건물 틈 사이로 발견하게 되는 ‘붉은 빛’ 덩어리의 낯섦이나 시간대별로 흰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화하는 순차적인 ‘동요動搖’에서 감지되는 가슴 설렘을 기억하고 그려집니다. 작가의 “연쇄적 가능성”은 긴장이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휘는 광확산 폴리카보네이트를 재료로 공간 속의 선처럼 드로잉하고, 그것들이 서로 얽히고 엮어져 입체구조를 이루는 형태입니다. 구조를 살펴보면, 일정폭과 길이로 이루어진 흰색 폴리카보네이트 조각 600여개가 연이어 볼트와 너트로 서로 연결되어 길이 6미터 크기의 비정형적인 입체조각 형태로 증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굴곡진 덩어리의 표면에는 애벌레 고치의 실처럼 가늘고 긴 플라스틱 선들이 외부와 지면을 향해 뻗쳐 있으며, 이것들은 살아 숨 쉬는 듯이 가볍게 움직이기도 합니다. 또 이 덩어리의 중심부로부터 붉은 빛이 발광하면서 마치 생명체의 원동력인 심장을 가까이 확대해 놓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작은 조각에서 시작하여 무한히 증식되고 재생되는 물질들의 결속과 이들의 유기적이고 자율적인 조합, 연속적으로 번식을 하듯 증폭되는 이 유리상자의 현재 장치는 다름 아닌 우리 시대의 문명과 인간의 상호작용, 세계 구축에 관한 기억과 상상을 시각적으로 재생한 것이며, 이것은 공간과 함께 숨 쉬기를 즐기는 작가 신체의 경험, 즉 유기체의 생명감으로 이해됩니다.

우리가 짐작하고 있는 세계의 구조, 아마도 개체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하며 유기적으로 결속하는 세계의 구조를 예술 내적으로 연결시키며, 새로운 예술 감성을 자극하려는 작가는 그 긴장감이나 우연성 혹은 논리성을 시각예술 내에서 다루는 실험을 무척 흥미로워합니다. 이것은 “연쇄적 가능성”의 생명감이 예술과 관계하는 지점에 대한 예지叡智적 해석에 관한 것이며, 거칠지만 자율적인 예술적 장치에 관한 미감과 유희의 유효성을 수식하려는 작가적 언어입니다. 현재를 기억하며 스스로의 생동生動 확장을 담론하려는 이번 유리상자는 시각예술의 확장성과 자체 에너지를 신뢰하게 합니다.

Memory as Fantasy, or the Fantasy Called Memory - Gim Jun Gi (Art critic)

Humans activate mechanisms of fantasy in order to escape from their oppressions in reality. Jung Hyeryun makes fantasies to expose the oppressions she experiences in society, and to create a world of sensibility free from such oppressions. They are the fantasies of the amusement park, which remain in her childhood memory. In Jung's works, the form of the amusement park is a medium to replay childhood memories and a device to amplify them. But the amusement park does not merely serve as a medium that is mobilized to represent the memory. She expands and reproduces the significance of the curves that appear in the amusement park. Jung Hyeryun releases amorphous drawings into the picture-plane and space. She uses a sensuous method of expression that stimulates the visual sense by utilizing the element of form called the curve. Jung's curves metaphorically show the methods in which memory exists. She does not depict the existence of memory rationally, but instead, scatters it about sensuously. 

For a while, Jung Hyeryun had made figurative works where certain forms were created with leather, and various icons were engraved on the surface. In this process, she established a strong image for herself as an artist who works with leather, as she dug into the characteristics and effects of the material. This made her into an artist who makes peculiar works with specific material, in other words, an artist recognized for her "particular style." Here, we may think about how the narrative and style are placed in a relationship of mutual conflict and supplementation in visual art. In some cases, the artist's thought seems to create the methodology, but the methodology created by the artist then re-produces thoughts and sensibility for the artist. In a situation where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act of work can be difficult to determine, Jung has transformed her code from leather to wood, from the second dimension to the third dimension. 

Memory of Fantasy 1 is a world of visual distraction consisting of overlapping amorphous circles. This work does not arrange neat perfect circles in an orderly fashion, but overlaps irregular ellipses or spirals. Such collective free lines are recomposed into circular movement to create illusions. The work is the result of recomposing a pencil drawing. Jung made numerous spiral drawings, recomposed them through digital editing, and then transferred them onto birch panels. The 11 panels themselves are overlapped in several layers, not only showing the world of chaos in place of order, but also creating even more disturbing optical illusions as electric motors rotate in circular motion. Spectators facing the work, in which disks of different sizes and shapes rotate at different speeds, may experience an optical illusion as if they were being sucked into a world of infinity. This suggests not a memory as an organized narrative structure, but memory as a fantasy system. 

When the lines that split the flat plane are expanded into lines that drift in space, we fall into a world of even deeper imagination. Memory of Fantasy 2 is an amorphous spatial drawing, which takes the flowing lines drifting in space, bends them and connects them with amorphous lines. This work is not a world of straight lines, but a world of curves, and shows the memory of fantasy linked to an infinite world through the resonance of lines as an amorphous space in a compressed manner. The work, which elaborately weaves wooden lines made by cutting birch panels within a 4 meter by 4 meter space, creates not only a physical space, but also a psychological one. It is not a static empty space, but a full space in a state of fluidity. It is not merely a solid space drawing, but a world of fantasy that urges for the liberation of sensibility through the rhythm of moving lines.

  Memory of Fantasy 3 is a three-dimensional sculpture in which rides from an amusement park are placed on top of a hat form made by connecting wooden panels. The hat is a medium which brings back childhood memories. Jung takes photographs of people at various locations which remain in her memory, and place this hat on the heads of those figures. The actual wooden hat, and the wooden hat represented through the photographs create a new story in terms of combination of style and narrative. Memory of Fantasy 4 is a work built out of the simple narrative of an amusement park on top of a magic umbrella by putting a model amusement park that spins at one's breath on a round panel and then attaching an umbrella-shaped support beneath. Both works, which add the image of the amusement park on top of forms of specific objects―hat and umbrella―make the most of the elegant feeling of lines in the birch panels themselves and the elaborately cut lines of thin leather to construct a cozy fantasy of a fairy tale world.

Rather than adding order and regulation to her works, Jung Hyeryun adds disorder and irregularity, thereby avoiding unilateral communication of messages and making thick layers of significance. Human behavior fundamentally tries to lower the level of disorder, which wants to return to the natural state, in other words entropy, and tries to raise the level of order, which wants to tie it to an order of the artificial state, in other words, negentropy. Art since the modern times has adjusted the speed and quantity of the communication of information by reducing negentropy or raising entropy. In other words, art based on modern aesthetics was established by reducing information concerning meaning stressed by pre-modern art, and strengthening aesthetic information by lowering the level of order. Jung's works also show a strong tendency of increasing the disorder level and reducing the order level. This is because she reduced the significance as representation and increased the aesthetic information as expression by condensing artificial objects consisting of an orderly structure into a world where amorphous curves flow without order.

Jung is in the process of gradually changing her previous attitude, trying to reveal the structure of society through personal sensibility. Particularly in the works featured in this exhibition, she attempts a simpler and clearer arrangement. This is a result of gathering the fragmented pieces of memory into the world of fantasy. Retreating one step back from compulsions of narratives such as social oppression or personal alienation, by revealing her memories as fantasies which exist in her sensibility, she conjures her memories as the source of sensibility scattered within her sense system, rather than memories as rational judgment or grounds for criticism. From the memories of the remote past to those from the near past, Jung Hyeryun expresses the individual memories organized by our brains not as something orderly, but as a world of chaos. That is to say, rather than weaving memories of the past into a world of order, she disperses them into a fragmented world of confusion. That is because she knows all too well that our memory is not a mechanism that recomposes the reality, but a world of chaos and disorder, and a mechanism of fantasy.

지속적 변형과 뫼비우스의 띠 - 강선학

정혜련의 <추상적 시간>은 둥글게 말린 선들의 조합, 하나의 선으로 이리저리 말려가거나 펼쳐지는 선들 사이로 공간은 구획되고 연결되고 단절되면서 시선을 이끈다. 선의 흐름에 따라 공간이 다급하게. 때로 느슨하게 완만하게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그것을 선이라 하기에는 면이고 면이라고 하기에는 입체적 공간을 가지고 있다. 엄밀하게 사물로서 입체적 공간을 가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면성이 강하고 그렇게 보게 된다. 그러나 그 평면조차 휘어져서 입체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뫼비우스 띠처럼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버린다. 결국은 평면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의 특징이랄까 아니면 물질을 이해하는 태도나 구성에서 기존의 입체를 만드는 구축적 방법에서 벗어나 있다. 그가 다루는 물질은 자신이 어떤 공간을 구축하기보다 공간을 구획하고 횡단하고 통과할 뿐이다. 그의 이 작품은 재료 자체의 물질적 양감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면에서 평면성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한다. 그는 근래 일련의 작업들을 이런 방법적 맥락에서 시도한다.

밝은 쪽으로 드러나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선들의 전진은 공간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선과 선이 만나고, 면과 면이 만나 일정하게 자신의 의지를 가두는 공간을 만들기보다 과정으로서 공간으로 두고 만다. 선을 이루는 재료의 양 끝이 만나서 타원이나 비정형의 원을 만들지만 선의 연속이지 양감을 가진 공간으로 보기 힘들다. 그의 작업은 흐름이라는 선의 특징을 따라가고 실질적으로 면을 꺾어 입체를 만들어 공간을 가두지 못한다. 그저 공간 사이로 비집고 다니면서 공간을 일시적으로 분할하거나 반응하게 할 뿐이다. 횡단하게 할 뿐 어느 곳에서도 맺히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평면적이고 선형적 흐름을 보일 뿐 일반적인 입체감을 만들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흐름이라는 요소가 작품을 감싸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흐름은 시간으로 읽거나 이해할 수 있지만 딱히 그렇게 규정하기 힘들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선의 이동으로 만나는 시간이란 평면작업에서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시간성을 주요 개념이나 의미로 드러내지 않는다. 도리어 공간의 다양성, 공간의 다양한 반응과 양상들을 보여준다. 작품을 싸고도는 임의적인 공간의 흐름이야말로 그가 여느 작가나 작품들과 다른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의 작업 앞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유연한 재료들의 활용이다. 만져보면 유연하지도 않다. 그저 적당하게 굴신이 가능한 정도이다. 물론 길게 자른 재료가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고 이어나가기를 계속한다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곡선을 위해 그는 단선적 부분들로 자르고 다시 붙이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그것을 모듈이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모듈이란 여러 가지 형태를 구성하거나 구축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 단위적 재료활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듈은 그저 구축 가능한 단위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가 잘라 붙이는 과정에서 잘라 붙이는 그것으로 형태나 공간을 구성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요소로서 작용하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구성단위나 기능단위 혹은 조립의 단위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듈이라는 단위의 어휘가 그의 작품 내용이나 방법을 대신하기는 너무 일반적인 것 같다.
그리고 형태의 구축에서 뿐 아니라 광확산 P.C라는 재료를 이용해서 빛을 퍼지게 하는 효과를 활용하고 있다. 작품의 변형가능태를 형태나 구조를 넘어 빛에 반응하는 것으로 확장하고 있다. 모듈을 통해 형태 구축의 가능태를 잠재적 요인으로 수용하고 있듯이 빛이라는 새로운 재료를 이입함으로 그의 작업은 유연함을 더 얻게 된 셈이다. 곡선을 만드는 유연함에 빛이라는 시각적 효과를 부가하게 되었고, 일정한 조명이 굴신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조명으로 지각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축과정이나 설치에서 주어진 환경과의 조응이라는 유연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유연함을 장점으로 삼고 있지만 그가 하고 있는 작품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말하자면 재현으로 어떤 기미도 안겨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이 대상의 재현이다. 재현을 포기할 때 인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 뭉치의 공간, 그리고 한 뭉치의 재료와 그 재료들이 놓여 있는 모양새다. 구조적인 작업이 설치된 환경과의 반응이다. 그의 작업이 내부적으로 모듈이라는 단위들이 서로 반응하고 있다면 외부적으로는 유연함으로 외부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묻는다. ‘추상적 시간’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시간 그 자체는 지각될 수 없다. 다만 구체적인 사례, 물질의 변화, 형태의 변화를 통해 지각되는 것이다. 추상적 시간이란 말하자면 지각되지 않는 시간, 시간성이라 부르는 특징을 말하는 것인데 과연 그의 작품에서 이런 시간성을 시각화 했거나 지각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에 추상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것인가 하고 묻게 된다. 게다가 제목이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문학적 상상을 부추기는 오해만 아니라면 제목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작업은 구체적 물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개념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의 『추상적 시간』은 사물/작업의 특징을 드러내기보다 도리어 설명적인 언어에 가깝다. 그러기에는 또한 시각적 사물성, 하나의 뭉치로 던져져 오는 공간감을 시간성으로 이해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시간은 철저하게 구체적 공간을 통한 지각 경험의 하나이다. 선형적이거나 분할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의 작품은 지속적 변형이라는 지향으로서 미완과 더 이상 손댈 수 없이 완성된 작품으로서 제시라는 양면성 때문에 완성과 미완이라는 이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완성된 작업으로 주어지는 것에서 변동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변동은 보는 이의 관람시선에 따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해체와 재결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구축한다는 면에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변형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그의 작업을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우선 주어진 것은 선을 이루고 있는 조각(모듈)들의 조합이다. 그것을 두고 모듈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구성요소들의 구축이 작업 과정에서 중요한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런 특징은 접합점을 눈에 띄게 시각화한 것에서 바로 보아낼 수 있다. 자신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모듈이라는 특징이 구축과정이 아니라 구축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놓여 있고, 작품이 그런 특징을 가질 때, 상호수행적인 특징으로 주어질 때 드러나지만 하나의 완성된 구성으로 주어질 때는 다른 측면을 가진다. 그것은 이미 새로운 구축 가능성이라는 임의성이나 가역성이 아니라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는 요소일 뿐이다.
그의 작품은 이 근래 하나의 형태로 구성되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른 공간에 적응하는 변화와 변모를 기반으로 삼고 있음도 눈여겨지는 부분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완성이라는 오브제의 제시가 아니라 요소들의 구성으로 여러 가지 형태들로 구축되는 맥락으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재료, 그의 표현에 따르면 모듈이라는 요소들이 하나의 작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용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지속적인 변형태를 잠재적 힘으로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시간성(추상으로서 시간)에 놓여 있음도 보여준다.

지속적인 변형 가능성은 완성된 형태가 주는 기호학적 차원(기의와 기표의 일대일의 대응관계)의 붕괴를 가져온다. 그것은 모듈이라는 요소들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활용하면서 그 가능성을 불러내는 일인데 설치, 해체, 재설치의 과정을 통해서 같은 요소들이 다르게 구축되고 구성되고 형상화된다는 것이다. 모듈이라는 기호에 내재한 신체적 가치와 감각을 복원해내는 일이며 그것을 시간적 특성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의 모듈이 정해진 요소로서 한 작품에 소속되어 완성되는 기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기능으로 요소화 되고 다르게 구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르게 구축된다는 말은 지속적인 변형태로 기능한다는 의미이다. 지속적 변형태야말로 시간이라는 속성에 함축된 내용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단위들은 얼마든지 확장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확장 가능하다는 것은 공간의 특성이자 시간적 특징이다, 시선의 이동과 단위들의 연결이라는 물리적 시간과 공간이 구성되는 유연함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의 구축된 공간, 구축된 선의 조합이 이루는 공간이다. 그것은 정지된 형태이며 시간의 성격보다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다만 그 공간이 다른 형태로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성되기 전의 특성이며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이미 완성된 구성체로서 주어진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비가역성의 부정이다. 비가역성이 변화 가능성으로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특징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계열적인 새로운 형태들일 뿐이다. 새로운 창안이고 시도이며 형상들이다. 잠재적으로 공간은 새로운 구축으로 형태를 변화할 수 있으며, 그 변화는 곧 시간적 존재로서 그의 작품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느 것에도 완결되지 않는 공간적 특성만을 보이는 작품 전체를 견지해 가는 것에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그 작품은 언제나 미완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미완일 때 그것은 시간성을 갖는다. 시간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동한다.
그의 시간은 구체적인 형태로서 드러나는 시각적인 지각이 아니라 추상으로서 시간성을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이 공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 특성을 보이는 것도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하나의 선의 뭉치가 만드는 공간의 뭉치이다. 입체도 평면도, 구축적인 특정 형태를 갖는 구조적 입방체도 아닌 가능태로서 자기모순적인 뫼비우스의 공간이다.

그의 작품을 읽는 이 양가적 인상, 비시간성으로서 하나의 공간 뭉치로 보이는 요소와 지속적 변형가능태로서 구축적 요소는 시간성이라는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작품의 특징이자 난해함을 만드는 요소이다. 때로는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같은 차원의 다른 이해의 접면이라는 점에서 그저 평이한 구성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작품에서 논쟁적 지점이라는 점에서 작품 해석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는 셈이다.

2010 부산비엔날레 - 김성연(대안공간 반디 디렉터)

김성연 (대안공간 반디 디렉터)
정혜련은 가죽이라는 독특한 재료로 의문 없이 받아들여져 왔던 우리의 관념에 대한 비틀기를 시도한다. 어린 시절부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동화캐릭터, 교과서, 연예인 그리고 정치·사회가 지닌 ‘힘’에 관한 문제에까지 그녀의 관심은 확장되고 있다. 현대사회의 불합리와 부조리한 단면을 마치 놀이동산의 불안정한 구조물과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고 가죽으로 재구성된 상징적 건물들을 통해 진실과 허상사이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관념에 대한 재해석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심각하고 무거운 접근을 경계한다. 유머러스한 접근과 가벼운 재료로 오늘날의 권력과 제도에 대한 인식체계를 비튼다. 작가는 초기 작업에서 권선징악의 스토리가 지배적인 동화 속 인물이나 만화 속 캐릭터들에게 부여된 이미지들을 뒤바꿔놓았다. 무서운 얼굴의 신데렐라와 피노키와 같이 상식적이고 식상한 이미지들에 대한 비틀기로 무의식중에 우리들에게 내재된 기존의 관념과 편견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었다. 이들 작업에 주로 쓰였던 가죽이라는 소재는 실제 생명을 가진 존재와 만들어진 이미지와의 간극을 모호하게 하는 질료로 작용하였다. 2005년 성곡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서는 교과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에서부터 연예인들에 이르기까지 관심이 확장되었고 이후 파출소나 백악관과 같은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이나 근육질의 보디빌더 등을 등장시킨 가죽 프린트 설치작업들로 제도 속에서 구축된 권력의 허구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얼마나 우리의 표상이 허구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최근 수년간 관심을 보여 온 원더풀 월드는 이전 작가가 관심을 보였던 개별적 대상들이 집합적으로 구성된 작업이다. 그녀는 모조품들로 이루어진 놀이동산이라는 작은 세상의 재구성을 통해 사회의 허구적 구조를 제시하는 것과 동시에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놀이공원형상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 질듯 한 나무구조물에 매달린 국적도 양식도 모호한 조잡한 건축물들의 조합들로 이루어진 놀이공원은 오늘날 급속히 이루어지는 개발과 파괴, 자본과 권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회전목마, 대관람차, 롤러코스터와 같은 놀이기구가 주는 흥미와 유혹 이면에 존재하는 허무적 상황과 과장된 상징적 모순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거대하고 불안한 구조물들로 현대사회의 양면적ㆍ모순적 구조를 상징적ㆍ역설적으로 드러내며 우리가 이상이라고 꿈꾸는 미래의 실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꿈과 이상의 상징인 이 아름다운 세상(wonderful world)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미디어들의 메트로폴리스 -The Wonderful World 김미진 (홍대교수, 예술의전당 전시감독)
정혜련은 주로 오늘의 현실세계에서 등장하는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인물과 건축물을 역사적인 영웅이나 기념비적인 것과 대입시켜 정치적 풍자로 표현하는 작업들을 해 왔다. 이번 세오갤러리의 개인전은 The Wonderful World라는 주제로 이 시대의 도시풍경을 놀이공원처럼 설치해 놓는다. 전 세계에 있는 기념비적 건물은 허름한 가죽위에 전사되고 이미지만 남아 회전목마와 바이킹, 커다란 원형의 탈 것이라는 놀이기구가 된다. 철학자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들 뉴욕, 파리, 도쿄, 홍콩 등은 문명사의 전시장이라기보다 총체적으로 동원된 미디어들의 메트로폴리스라고 했다. 그리고 건축은 움직임(mobile)이고 도시는 동적(kinetic)이며 주거생활은 환승적(트랜지트 transitiv)이며, ‘도회적 실체’는 항상적인 변화에 굴복 당한다(1)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던의 이 시대는 인류의 역사적 상징물인 기념비 건축물들을 실제장소 보다 컴퓨터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세한 부분과 개인이 선택한 부분들을 확대해 가며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모조품들은 유원지에서 러브모텔과 식당으로 변형되며 역사적 가치는 없어지고 단지 유희의 장소로만 남는 경우도 있다. 정혜련의 작업은 이런 역사적 성스러움과 가치에 대한 변형된 오늘의 풍경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금성, 바티칸, 모스코바의 크렘린 궁 등 실제건축물의 이미지가 실사된 가죽천은 언제든지 둘둘 말아 원하는 장소에 설치된다. 그리고 그것은 놀이기구의 원형이 되어 원래의 고급기능을 빼앗아 가벼운 풍자의 웃음거리를 만들며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낸다. 정혜련의 작업은 팝아트의 맥락을 이으며 유목민(Nomad) 사고를 접목시킨 것으로 대중적인 것 보다 더 허접한 재료를 사용하여 이 시대의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예술에서의 고정적인 것과 체제순응적인 것에 도전하고 있다.서로 다른 역사적 건축물, 생나무 뼈대와 그려진 놀이기구는 서로 조합되고 해체되어 구조와 탈구조의 거대한 축을 통해 이 시대의 유토피아를 표현하고 있다. 과연 원더풀 월드는 무엇일까? 정혜련은 미디어에 의해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가 생산되고 또 바로 눈앞에서 잡을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창조해 낼 수 있고 또 사라져 버리게 할 수 도 있는 인간 본연의 정체성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명의 껍질 , 그녀에게 말 걸기 - 강선학

흔하게 만날 수 있다는 친근감과 다른 생명체의 껍질이라는 거부감이 겹쳐져있는 가죽이라는 재료는 정혜련의 작업을 읽는데 중요한 통로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가죽 조각들을 이어 붙인 형태 들에서 생기는 조합적 특징, 혹은 분열적인 이미지는 그녀가 구축하고 있는 인간이나 사물 혹은 사건의 형상화에 독특한 서사 구조를 만들어 주고 있으며 현대인들의 심성을 드러내는데 적절하게 쓰여지고 있다. 콜라주의 집합에 의한 생성과 분열의 이미지는 단순한 형태와 내용인데도 공명의 폭이 넓게 펼쳐지게 한다. 사람 혹은 개 또는 로봇이지만 그것이 만드는 작은 조각들은 요소로써 일부이자 독자적 형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이것이 모여 큰이야기와 형상을 만들고 있다. 반대로 한 형상을 그런 작은 요소들로 분할 시켜 버리기도 한다. 이 분할과 결합의 이중성 사이에서 그가 말하는 바가 드러난다. 이 전 전시의 작품에는 사람의 머리를 주 소재로 가죽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형상들이 있다. 그 형상들은 인체 부분의 훼손, 조각조각 붙인 자국들로 현대인이 가진 분열과 감각기능의 마비라는 불구성을 보는 이로 하여금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흡입력을 보여 주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것은 주로 저 부조의 형태로 벽면에 붙이는 작업들이 대부분이다. 회화의 붙 자국 같은 가죽의 이음새는 저 부조의 형태가 가진 독특한 연상 작용에 의해 의외의 효과와 의미를 제시한다. 그림자처럼 처리된 형상들은 그녀가 만들어 내고 있는 인물들의 그림자로서 총알 구멍이 숭숭 뚤린 것들이다. 그림자는 은유와 총이라는 사실적인 형태들이 주는 이중적 병치로 보는 이를 의아한 상황 속으로 몰아간다.

<그녀는 개다>라는 작품은 언어적 도단의 직유이자 그 함유된 뜻이나 비유로서의 역할도 너무 상투적이다. 그러나 그녀의 조각 붙이기라는 작업 방식에 의해 이 단조로운 비유는 상투성을 넘어선다. 사람을 닮은 개가 혀를 길게 빼물고 있는 형상이 그런 것이다. 몸뚱이는 사람의 형상이지만 그 자체는 개의 형상이다. 개 같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는 개 자체이다. 개는 순종의 상징으로 읽혀진다. 하지만 그 순종은 혀를 길게 내밀 만큼 힘들다. 길게 내문 혀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이 곧 언어 도단의 상황이다. 그 언어 도단은 그녀에게 종종 나타난다. 도 혀를 길게 뺀 채 개처럼 엎드려 있다. 는 작가가 어린 시절 유행했던 만화영화 로봇 태권 V를 소재로 삼아서 로봇에게도 혀를 빼물게 만들어 버렸다. 개도 사람도 로봇도 다들 소통으로 언어 기능을 잃어 버린 꼴이다. <이소룡되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소룡의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그 자신 길게 빠진 혀를 몸에 두르고 있다. 이 엉뚱하고 엽기적인 상황은 자신이 자신의 언어로 말 할 수 없고 왜곡된 몸으로 보여줄 뿐인 반어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회화적인 이 작업들의 의미는 <카운터 아가씨>나 <아가야!>에서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카운터의 작은 창구를 통해서 서로 마주보고 있지만 뚫린 창 사이에 가려진 상대는 왜곡되게 보이고 그 사이에 총구를 정면을 향해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카운터 아가씨와 손님이 적대적 혹은 경제의 관계로 만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업은 형상이 주는 의미와 형태감이 너무 강해서 조각들을 붙인 재료와 콜라주로서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자체의 의미의 자율성 보다 작가의 간섭이 완강하게 드러난다. <아가야!> 역시 아기라는 인물이 총을 들고 있고 그 총구가 보는 이와 정면으로 맞닥Em리게 되어 있다. 턱받이를 하고 작은 팬티를 입은 아기가 총을 들고 있다. 장난감 총으로 그 엽기적인 상황을 순화시켜 볼 수도 있지만 성인의 얼굴을 한 아기라는 은유는 상황을 더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 보는 이에게 총구를 정면으로 들이대고 있는 아이와 그 아이를 사방에서 작은 줄로 고리를 끼어 잡아 당겨 인체의 일부가 늘어나 있는 모습은 그 적대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일러 주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타자와 자신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 주지만 구체적 타자가 없는 적대감이다. 총 때문에 전쟁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지만 굳이 전쟁이라는 연상이 아니라도 그런 긴박감, 절실함, 혹은 황폐함에 대한 의미들을 생성하고 있다. 더구나 가분수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유아용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은 그 불균형한 형상과 동판을 용접으로 이어 붙인 자국만으로 충분한 네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탈 수 없게 된 자전거나 머리에 뾰족뾰족하게 융기된 돌기는 정상적 상황이 아님을 보여 준다. 황폐한 어떤 정황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함께 갖가지로 구성된 현실의 비가역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 기저를 이루는 이 반어적 어법에 주목하고 이해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의 작품에 말 걸어 보는 통로일 것이다.

견고한 실재의 이면을 탐구하는 작가 - 이영준(큐레이터,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부산 서구 대신동의 조그만 작업실. 정혜련은 오늘도 그곳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원을 하는 언니의 고마운 배려로 1층을 개조해 마련한 작업실은 비록 작지만 작가에게는 더없이 환상적인 작업공간이다. 아담한 키에 귀여운 얼굴이지만 끝을 쉽게 알 수 없는 넓은 속내를 가진 작가다. 작가는 부산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2004년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에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송암문화재단 신진작가, 봉생청년문화상, 하정웅 청년작가상, SEMA신진작가, 김종영미술관 2012 올해의 젊은 조각가 등 화려한 수상경력과 대만의 관투 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OCI미술관, 공간화랑, 세오갤러리 등 국내외 미술관과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진바 있는 역량 있는 작가다.

과거 작가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것은 일련이 ‘가죽’시리즈의 작업이었다. 작가는 초기에 자신의 성장과정에 영향을 미쳤던 이야기나 이미지를 재해석 혹은 재구성하기를 즐겼다. 예를 들어 로봇태권 V, 피터팬, 피노키오, 장화홍련 등과 같은 동화나 배철수와 윤종신 등 대중적인 스타들에 관심을 보여왔다.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이야기와 이미지 속에 내재된 숨겨진 이데올로기가 우리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선과 악, 성실함과 게으름, 진실과 거짓 등 가치판단의 기준을 끊임없이 제시해준 우상들을 유머러스하게 비틀거나 희화화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작가는 권위의 상징인 청와대나 국회와 같은 건축물들을 자신이 즐겨 사용해 왔던 가죽으로 재현함으로써, 견고하거나 굳건한 이미지가 탈각된 전혀 다른 맥락의 오브제들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이후 작가의 관심은 놀이공원에 집중되었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그 위험한 것들을 돈을 내고 타는’ 놀이기구들은 인간의 허무한 욕망이 만든 ‘환상공간’이다. 마치 손쉽게 현실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이 공간은 인간들이 만든 합의된 ‘잉여의 공간’이다. 작가는 이 공간을 엑스터시가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마치 폐허나 무덤처럼 보여준다. 정혜련 다운 패러독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놀이공원 시리즈는 작가의 최근 작업들의 모티브가 되었고, 급격한 작업의 변화를 이끈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 작업들을 하면서 작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동안 네러티브에 집중했던 작가의 작업스타일은 조금씩 자신의 내면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한다. 이후에 제작된 비정형의 공간 드로잉들은 모두 놀이공원 시리즈에서 구현했던 형태들의 변형들이다. 작가는 이제 이야기를 해체하면서 얻어지는 자신의 무의식적 ‘버릇’들을 탐구한다. 가령 반복된 원들이 회전하는 작업은 자신의 드로잉을 입체화하여 움직임을 부여한 작품이다. 무심코 그린 드로잉 속에서는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정혜련의 특징들이 숨어있으며 이들은 하나의 구동체에 의해 맞물려 돌아가는 필연의 산물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드로잉들을 모듈(module)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듈화된 형태들은 공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재구조화 된다. 또한 광확산수지라는 재료와 결합되면서 작가의 작업에는 빛과 움직임이 공존하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런 면에서 정혜련의 최근 작업들은 시간과 공간이 자신의 기억 속 형태들과 함께 조우하는 일종의 자동기술적 공간드로잉이다. 이 자동기술적 드로잉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순수기억중에서 언어화된 견고한 기억들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행간(Interline)의 기억, 혹은 비언어적인 몸의 기억에 대한 형태들이다.

정혜련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관심은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실재’라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 허상인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그리고 외부세계에 대해 발휘되었던 그 의심은 이제 자신의 내부, 즉 작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던 기억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최근 작업들은 자신의 기억을 해체하고 자신의 몸에 각인된 기억의 형태들을 찾아가는 그 집요한 과정의 산물들이다. 바로 이것이 형식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모더니스트들의 추상적인회화나 조각과는 차별화 되어야하는, 정혜련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자 의미이다.

월간미술 2007년 8월호 그로테스크한 판타지, 유머러스한 비틀기 - 월간미술 류동현기자

사람이 기억을 하게 되는 동인(動因)은 무수히 많다. 시각, 후각, 청각 등 이른바 오감의 여러 요소가 얽히고 설켜 기억의 한부분으로 차곡차곡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정혜련의 작품이 그랬다. 2004년 가을의 어느날 부산의 조그마한 전시공간에서 개인전을 위해 땀을 쏟고 있던 정혜련을 만났을 때 작품이 풍기는 강렬한 시각적 인상과 함께 작품 ‘냄새’가 기자의 기억 속 한 귀퉁이 문을 열고 들어앉은 것이다. 3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냄새는 기자가 정혜련을 기억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작품에서 ‘냄새’가 난 것은 그의 작품 재료가 독특하게도 ‘가죽’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미술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시대라지만, 가죽은 여전히 대중에게 패션의 한 축으로만 각인되어 있다. 정혜련이 그 생각을 보기좋게 ‘비틀어’ 버린 것이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가 작업에 어떤 재료를 쓸지 고민하다가 미술계에는 아직 ‘신천지’인 가죽을 소재로 작업에 매달린 것은 2004년. 인류의 탄생과 함께 사용된 가죽이라는 재료에서 인간적인 익숙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의 작품은 전시장을 메운 가죽 냄새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오히려 강렬한 낯섦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비틀어버렸다. 이 표출된 어두운 피터팬과 백설공주, 로보트태권브이…. 사회 시스템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획일적 가치를 유머러스하게 비틀고 왜곡한 것이었다. 3년의 시간이 흘러 올해 세오갤러리에서 열린 정혜련의 전시에 등장한 작품들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목재 뼈대에 가죽이 덧입혀진 놀이동산 기구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세계 유수의 건축물이 놓여 있는 전시장은 제목 그대로 ‘원더풀 랜드’다. 정말 타보고 싶고 가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작가의 ‘비틀기’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작업 내공이 쌓인 탓일게다. 그의 작품은 유목민이 가죽으로 만든 거주지 ‘파오(pao)’와 유사한 감성을 뿜어내지만, 정작 보이는 이미지는 모뉴멘털적인 건물이다. 겉과 속이 다른, 화려한 외관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잠시 판타지와 쾌감을 준다. 그리고 놀이동산이 우리에게 주는 인생의‘플라시보 효과’를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조롱한다. 아직까지 그의 작업은 진행형이다. 작품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작가에게서 유머러스한 작품 이면의 치열한 내공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그의 작업 속에 그려지는 판타지와 비틀기, 그리고 ‘냄새’는 그의 작품을 어디서 만나도 기억 속 문을 여는데 문제가 없을 듯싶다.

그들은 웃음을, 우리는 냉소를 - 이대범 평론가

정혜련의 작업은 외피에 대한 탐구이다. 그것은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 다른 생명체의 껍데기인 가죽을 이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등장 인물들의 내재된 속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혜련이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우리의 삶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는 인물들이다. 이 모순적인 말이 정혜련의 작업의 장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동화 속 인물들이거나, TV에 등장하는 대중스타 이거나,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들은 우리의 성장과정이나 삶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의 외피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구성된 정혜련의 인물들은 완전한 육체를 얻는 것이 아니라 가죽만을 지니고 벽에 달라붙어 있거나 아무런 부피도 지니지 못하고 나무판의 평면적 특성으로 전시장 한 가운데에 서있다.

그렇다면, 외피가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일가. 정혜련의 인물들은 작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다른 인물들로 보인다. 즉, 보이는 이미지의 특징을 수집하여 그것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얼굴은 음울한 기운으로 가득하고 어딘가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다. 이들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외피를 통해 감추고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이미지가 지닌 허위의 모습을 작가가 까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물들은 희화화되고 음울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가죽만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내부에 숨겨진 것들은 우리 사회에 인식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모습이다. “영희야 놀자”라는 문구와 함께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인물의 크기이지만, 한 인간의 모습이기보다는 과장으로 가득 찬 큰 이미지들이다. 정혜련 작품 속 인물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품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등장하는 것이다.
정혜련의 작업에서 단순히 형태의 외피만을 보고 있지만, 그 내부의 진실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냉소적 웃음과 함께. 우리의 삶에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영희들이 그리고 TV에 나오는 윤종신과 배철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내부를 감추고 외부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그들은 웃으며 우리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웃음만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정혜련과 나의 냉소적 웃음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정혜련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동화 - 이영준(큐레이터)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작가가 모색해 온 변화의 폭을 보다 확대해서 보여줌과 동시에 지속된 작가의 관심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These works show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성장과정에 영향을 미쳤던 이야기나 이미지를 재해석 혹은 재구성하기를 즐겨왔다. 예를들어 로봇태권 V, 피터팬, 피노키오, 장화홍련 등 어린아이도 알만한 동화나 대중적인 스타들에 관심을 보여왔다. 극복이 만만치 않은 나무나 가죽 그리고 고무와 같은 재료를 자르고 붙이고 채색하는 엄청난 수공을 통해 완성된 그녀의 작품들은 재료들이 주는 독특한 텍스츄어로 인해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크게 3가지의 테마로 구성되어있다. 누구나 어렸을적 한번쯤 탐닉했던 만화영화나 동화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교과서에 제시된 영희나 철수와 같은 상투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TV매체에 등장하는 대중적인 스타들을 희화한 작품들이 층별로 전시되어있다. 작가의 작업은 어린시절의 충동적인 기제들속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선과 악, 성실함과 게으름, 진실과 거짓 등 가치판단의 기준을 끊임없이 제시해준 고마운 지침서들을 이제 새롭게 읽고자 한다. 작가는 이들 동화들이 들려주었던 아포리즘속에서 새로운 담론을 끌어내려 하는데 가령 늠늠하고 튼튼한 태권 V가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거나 배철수와 윤종신을 광대로 희화한 작품들은 내면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들의 우상들을 해체하고 있다. 또한 교과서에 실렸던 즐거운 명절은 어스름한 달빛아래서 감동없이 치러지는 형식적인 축제로 제시되고있다.

정혜련의 작품은 뚜렷한 답이 내정되어있는 기제들 속에서 또다른 의미들을 성찰하게 해준다. 이는 하나의 해석으로 일관했던 우리들의 상투적인 버릇을 반성하게할 뿐 아니라 이분법적인 가치판단의 전형들을 해체하여 다층적이고 수평적인 사유체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시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부산시립미술관의 신인전과 대안공간 반디의 신진작가공모에 당선되기도 하였는데 이번 전시에서 그녀가 보여준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는 작가로써 더 큰 성장의 잠재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미디어들의 메트로폴리스 -The Wonderful World - 김미진 (홍대교수, 예술의전당 전시감독)

정혜련은 주로 오늘의 현실세계에서 등장하는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인물과 건축물을 역사적인 영웅이나 기념비적인 것과 대입시켜 정치적 풍자로 표현하는 작업들을 해 왔다. 이번 세오갤러리의 개인전은 The Wonderful World라는 주제로 이 시대의 도시풍경을 놀이공원처럼 설치해 놓는다.전 세계에 있는 기념비적 건물은 허름한 가죽위에 전사되고 이미지만 남아 회전목마와 바이킹, 커다란 원형의 탈 것이라는 놀이기구가 된다. 철학자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들 뉴욕, 파리, 도쿄, 홍콩 등은 문명사의 전시장이라기보다 총체적으로 동원된 미디어들의 메트로폴리스라고 했다.그리고 건축은 움직임(mobile)이고 도시는 동적(kinetic)이며 주거생활은 환승적(트랜지트 transitiv)이며, ‘도회적 실체’는 항상적인 변화에 굴복 당한다(1)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던의 이 시대는 인류의 역사적 상징물인 기념비 건축물들을 실제장소 보다 컴퓨터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세한 부분과 개인이 선택한 부분들을 확대해 가며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모조품들은 유원지에서 러브모텔과 식당으로 변형되며 역사적 가치는 없어지고 단지 유희의 장소로만 남는 경우도 있다.

정혜련의 작업은 이런 역사적 성스러움과 가치에 대한 변형된 오늘의 풍경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금성, 바티칸, 모스코바의 크렘린 궁 등 실제건축물의 이미지가 실사된 가죽천은 언제든지 둘둘 말아 원하는 장소에 설치된다. 그리고 그것은 놀이기구의 원형이 되어 원래의 고급기능을 빼앗아 가벼운 풍자의 웃음거리를 만들며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낸다. 정혜련의 작업은 팝아트의 맥락을 이으며 유목민(Nomad) 사고를 접목시킨 것으로 대중적인 것 보다 더 허접한 재료를 사용하여 이 시대의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예술에서의 고정적인 것과 체제순응적인 것에 도전하고 있다.서로 다른 역사적 건축물, 생나무 뼈대와 그려진 놀이기구는 서로 조합되고 해체되어 구조와 탈구조의 거대한 축을 통해 이 시대의 유토피아를 표현하고 있다. 과연 원더풀 월드는 무엇일까? 정혜련은 미디어에 의해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가 생산되고 또 바로 눈앞에서 잡을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창조해 낼 수 있고 또 사라져 버리게 할 수 도 있는 인간 본연의 정체성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상적시간에 대한 명상 - 미술평론가 최태만

2012년 8월 31일. 이날은 김종영 미술관이 ‘올해의 젊은 조각가’라는 전시를 개막한 날이다. 앞의 짧은 문장은 시간과 장소를 각인하고 있다.
2012년 8월 31일은 지나갔다.
아무리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한들 이미 과거가 된 시간을 되살리기란 불가능하다. 시간의 비가역성은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드러낸다. 우리는 시간을 흐름으로 인식한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에 이르는 직선 운동을 하기 때문에 반복이 성립 될 공간은 없다. 더욱이 우리는 시간을 공간과 분리할 수 없다. 마치 강둑에 앉아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흐르는 시간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조와 직관을 통해 그렇게 할 수는 있을것이다. 그러나 불행 하게도 시간과 공간을 분리 할 수 없다. 시간은 공간과 완전히 섞여있으며, 공간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다는 것은 시공간이 일치된 특정 상황을 돌이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 하고 개별적 일 수 밖에없다. 즉 같은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하더라도 경험의 개별성 때문에 지나간 시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불려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통해 복원하는 시간을 구조화 할 수는 있다. 마치 라캉(Jacques Lacan)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구조화된 시간은 추억속에 생기를 얻게 되고 재생되며 그러므로 해석 가능하다.

반복되지 않고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이 복원되는 기억의 세계는 실제로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어슴푸레 하게 떠오르는, 만질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는, 부서지기 쉽고 금방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구체적이면서 모호한 기억은 과거로만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질주 할 수도 있다. 과학적이면서 수학적인 시간은 기억 속에 추상적인 것이 된다. 사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추상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혜련이 작업의 모티브로 설정한 ‘추상적시간’은 시간의 속성을 잘 건드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가 입체를 통해표현한 시간에는 공간이 배제되고 있다. 물리적으로현존하지 않고 머릿 속에만 있는 시간을 재현하고 있으므로 ‘추상적인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추상적 시간을 시각화 하기 위해 그는 작품속에 ‘운동’을 도입하고 있다. 마치 시계 바늘처럼 느리게 돌고있는 여섯개의 원반은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 시간을 측량하기 위해 인간이 발명한 시계는 추상적 시간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장치이다. 시계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측정 할 수 있으며, 소유 할 수 있고 또 정복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혜련의 작품 속에서 시간은 측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돌고 있는 선들의 운동일 따름이다. 그가 그려 놓은 선들이 회전 운동을 하면서 원심을 향해 수렴되는 블랙 홀과 같은 상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중심은 시공간을 빨아들여 삼키는 구멍이다. 이여섯개의 원반에 대응하는 것이 비정형의 구조물이다. 거의원(圓)에 가깝도록 휜자작나무를 이어붙인 이 구조물은 마구 뒤엉킨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 시킨다. 즉 어지럽게 엉겨 있으나 기본적인 모듈은 한부분이 열려있는 원이기 때문에 이어붙이는 방향에 따라 자유로운 ‘공간의드로잉’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이 작품의 구조적 특징이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복잡 하지만 실타래처럼 마구 뒤엉긴 것이 아니라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구조로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복잡한 형태는 시간이 직선 운동을 한다는 상식을 위반한다. 나선형으로 흐르면서 뒤죽 박죽인, 그러나 이 복잡성 속에 단순한 흐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맞은편 면에 조명을 부착한 것도 우리의 눈이 이러한 자유로운 흐름을 따라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장치인지 모른다.
이 작품은 특정한 공간이나 시간을 지시하지 않는다. 연속되는 굽은호(tilted arc)가 뒤섞인 상태는 해독 할 수 없는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한켠에 매달려 돌아가고 있는 비정형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가죽띠로 만든 물체이다. 와이어로 매달려 있으나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무구조물에 비해 가죽으로 만든 물체는 더욱 복잡하고 비정형적이며 더욱이 모터에 의해 움직이는 원반에 고착한 것이기 때문에 굽은 나무의 팽팽한 긴장을 고조 시키고 있다. 이어붙인 나무가 공간에 그려놓은 선은 이 가죽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조금씩 흔들리며 수없이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서 나는 텅비어 버린 시간을 느낀다. 사물은 움직이되 시간은 정지된 이상하고 모순된 상황과 같은 것이라고 할까. 어린이가 근육의 힘에 의존하여 종이위에 마구 휘갈겨 놓은 어지러운선이거나 청춘의 밤을 지새우며 종이가 새까맣도록 마구 휘갈겨 쓴 일기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까. 정혜련이 보여주고 있는 ‘추상적시간’은 논리적으로 증명 할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 마음에 담아 놓은 시간의 덩어리와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속성 조차 사라지고 있다. 구조물의 출발점이 곧 귀결점이 되는것에 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시간을 빌어 어지럽게 미끄럼을 타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 아오는 마음의 상태를 그려 놓은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더풀월드, 원더랜드
정혜련은 자신의 마음속으로 흐르는 시간을 형태로 구체화시키기 이전에 우리 사회가 놀이 동산과도 같다는 생각으로 원더풀 랜드를 제작했다. 2007년부터 그는 금방 스러질것만 같은 도시 풍경을 놀이 공원으로 재현 했다. 유쾌 하면서 불안한 이 작품을 보노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견고한 현실 이라기 보다 낯선 몽환의 세계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중으로 솟구쳤다 급강하 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롤러코스터 위에 위태롭게 얹혀있는 식민지 양식의 건물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요동치는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 일 것이다. 국적이 모호한 궁전과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화려하고 동화적인 놀이 동산은 얼마나 경이로운 세계인가. 놀이기구에 몸을 맡기는 순간 모든 것은 사라 진다. 오로지 신체를 그 기구에 의탁한 채 놀이에 몰입하는 순간 모든 걱정, 근심, 고통, 고뇌, 희망, 기대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자본주의가 걸어놓은 최면도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원더 풀월드는 결코 아름 답지도 경이 롭지도 않은 위태로운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마드> 연작에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보다 은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설 무대의 골조와도 같은 지지대 위에 올려놓은 청와대나 유럽의 어느 성채는 재료의 특성상 하중에 의해 내려 앉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왜곡된 건물의 형태는 2009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천막 당사를 보며 그가 느낀 한국정치의 부실함에 대한 반응이자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2010 부산 비엔날레는 그의 작품을 대형의 설치물로, 입체로 표현한 구현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만약 자작 나무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면 거대한 건설 현장 같기도 하고 우주 기지와도 같으며 놀이 동산이기도 한 이 작품은 금방 사라져 버릴 판타지를 신랄하면서 진지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나 복잡한 구조물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구축해 놓은 놀이공원을 을씨년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물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자작 나무의 속살이 그렇고 각자 돌아가고 있는 원반이나 구체(球體)가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갈등 조차 해소된 듯한 원더랜드 이지만 짓다만 공사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황량함이 남아 있는 이 작품은 원더풀랜드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허약한 가공의 세계 인지를 쓸쓸하고 엄숙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2010년 부산 비엔날레의 출품은 작업이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회적 비평은 의미있는 것이지만 그것에 집중 할수록 작품이 너무 서술적으로 고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원더풀랜드’에서 ‘판타지의 기억’으로 자기 변화를 모색했던 것이다.
우산, 모자와 같은 형태 위에 바람개비, 놀이 동산을 얹어 놓는 과도기를 거쳐 그의 작업은 마침내 주제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작품에서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 하거나 재현하기 보다 자유로운 선이 만들어 내는 조형적 집중과 확산, 시각적 긴장과 이완으로 그의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아울러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도입 했던 동력을 동원한 움직임을 순수하게 자기 목적적인 운동으로 국한 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사회적 발언으로부터 시지각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작품속에 형태 못지않게 그것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에 의한 일루전과 드로잉 효과를 더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나로서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나타난 작품을 바깥의 원더랜드가 작가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즉 그는 공간의 드로잉을 통해 시선을 현실 세계로부터 자신의 심리속으로 돌려 놓으며 불가해하게 느끼는 마음의 지도를 형태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상황을 잘보여 주는 작품으로 모터 한 개로 네 개의 원을 움직이는 ‘판타지의 기억’을 들수 있다. 많은 원들이 조금씩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이 작품에서 돌아가고 있는 원반 못지않게 그림자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한다. 실재와 그림자의 경계가 애매한 이 작품은 벽에 부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간에 떠있는 형태가 자유롭게 운동을 하는 듯한 시각적 착시를 불러 일으킨다. 이 작품은 작가의 이러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마음은 유동한다. 그것을 눈으로 보여주고 싶다.
이 작품으로부터 추상적 시간이 탄생 했다. 그는 작업을 하는 행위를 기억을 생산해 내는 과정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있는 생각의 연속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다이 달로스가 설계해 놓은 미궁속으로 들어가는 테세우스의 옷깃에 꿰어준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생각의 흐름을 찾기 위해 자작나무 패널을 이어붙인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그는 연속적이라기 보다 단절된 듯하고 일관성을 결여 하고 있는 것으로 지각되지만 실제로는 구조적으로 연결된 기억을 추적하는 장치로 비정형으로 뒤엉긴 실타래와도 같은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마구 뒤섞인 가죽 띠덩어리를 매달아 놓은 것이다.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완만한 운동,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암시 한다기 보다 유동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유기체인 인간이 마음의 움직임을 포기하는 순간 기억도 응고 될 것이다.

판타지로서의 기억, 또는 기억이라는 판타지 - 미술평론가 김준기

인간은 현실의 억압을 일탈하기 위해 환상기제를 가동한다. 정혜련은 자신과 사회의 억압을 들춰내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감성의 세계를 창출하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유년기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놀이공원이라는 환상이다. 정혜련의 작품에 있어 놀이공원의 형상은 유년의 기억을 재생하는 매개체이자 그것을 증폭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그 놀이공원은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매개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놀이공원에 등장하는 곡선이라는 요소를 확대재생산한다. 정혜련은 비정형의 드로잉을 평면과 공간 속에 풀어놓는다. 그는 곡선이라는 조형 요소를 통해서 시지각을 자극하는 감각적 표현 방식을 통해서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기억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흩어놓는다.

정혜련은 한동안 가죽으로 특정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형상을 새겨넣는 형상표현 작업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죽이라는 작업 재료의 특성과 효과에 천착함으로써 가죽으로 작업하는 작가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기도 했다. 이것은 그를 특정 재료를 가지고 독특한 작업을 만들어내는 작가, 그러니까 특정 스타일로 인정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시각예술에게 있어서 내러티브와 스타일이 어떻게 상호 갈등과 보완의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작가의 사유가 방법을 창출하는듯하면서도 작가가 만들어낸 방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작가의 사유와 감성을 재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자칫 작품활동의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가죽에서 나무로,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서사에서 감성으로 자신의 코드를 변화시켰다.

은 비정형적인 원들을 중첩으로 이뤄진 시각적 착란의 세계이다. 가지런한 정원(正圓)들의 질서 정연한 배열이 아니라 불규칙한 타원이나 나선(spiral)들을 중첩한 나무패널을 원운동으로 재구성하여 착란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종이 위에 연필 드로잉을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정혜련은 여러 장의 나선형 드로잉을 만들고 그것을 디지털 편집 방식으로 재구성한 후 자작나무 패널로 옮겨 놓았다. 11개의 패널들은 그 자체로 몇겹씩 겹쳐져 질서가 아닌 혼돈의 세계를 보여줄 뿐만이 아니라 전동모터에 의해 원운동을 함으로써 더욱 심난한 착시효과를 만들어 낸다.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은 각각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가진 이 원반들이 각각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이 작품 앞에서 무한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 이 작품은 정연한 서사체계로서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의 환상체계로서의 기억을 암시한다.

평면을 분절하는 선이 공간을 유영하는 선으로 확장할 때, 우리는 더욱 깊은 상상력의 세계로 빠져든다. 는 공간을 유영하는 유려한 선을 비정형의 곡선으로 휘어서 연결한 비정형이 공간 드로잉(spatial drawing)이다. 이 작품은 직선의 세계가 아니라 곡선의 세계이며, 정형화한 공간이 아니라 비정형의 공간으로서 선의 울림을 통해서 무한의 세계로 이어진 환상의 기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가로와 세로가 4미터에 달하는 공간 속에 자작나무 패널을 잘라 만든 목재 선들을 정교하게 얽어 놓은 이 작품은 물리적인 공간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공간을 창출한다. 그것은 정지상태의 빈 공간이 아니라 유동상태의 가득 찬 공간이며, 고체 상태의 공간 드로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선의 율동을 통해서 감성의 해방을 촉구하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나무 패널들을 이어붙여 만든 모자 위에 놀이동산의 기구를 얹어놓은 입체조작 작품이다. 이 모자는 유년의 기억을 되살리는 매개체이다. 정혜련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러 장소에서 인물 사진을 찍고 그 인물 위에 이 모자를 얹어 놓는다. 실물의 나무모자와 사진을 통해 재현된 나무모자는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결합이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는 입김으로 불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형 놀이동산을 원반 위에 올려 놓고 그 아래 우산대 모양의 지지대를 달아 마법의 우산 위에 펼쳐진 놀이동산이라는 단출한 서사를 구축한 작품이다. 모자와 우산이라는 특정한 사물의 형상 위에 놀이동산의 이미지를 덧댄 두 작품 모두 자작나무 패널 자체가 보여주는 유려한 선의 맛과 가죽을 잘라 만든 얇은 선의 아기자기한 느낌을 살려서 동화 속 세상의 아늑한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

정혜련은 자신의 작품 속에 질서와 법칙을 부여하기보다는 무질서와 불규칙성을 부여함으로써 단선적인 메시지 전달을 회피하고 의미생성의 층을 두텁게 만들었다. 인간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자연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무질서도, 즉 엔트로피(entropy)를 줄이고, 인공상태의 질서체계로 묶어두려는 질서도, 즉 네겐트로피(negentropy)를 높이려고 한다. 근대 이후의 예술은 네겐트로피를 줄이고 엔트로피를 높여 정보소통의 속도와 양을 조절해왔다. 다시 말해서 근대 이전의 예술에서 강조했던 의미정보를 줄이고, 질서도를 낮춰서 미적정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립한 것이 근대미학에 입각한 예술이다. 정혜련의 작품에서도 무질서도를 높이고 질서도를 줄이려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정연한 질서체계로 이뤄진 인공물들을 비정형의 곡선들이 무질서하게 유동하는 세계로 집약함으로써 재현으로서의 의미정보를 줄이고 표현으로서의 미적정보를 높였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감성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려고 했던 이전의 태도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중인데, 특히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에서 보다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파편화한 기억의 조각들을 환상의 세계로 집약한 결과이다. 그는 사회적 억압이니 개인의 소외와 같은 서사의 강박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자신의 감성 속에 존재하는 환상으로서의 기억들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이성적인 판단이나 비판의 근거로서의 기억이 아니라 감각체계 속에 흩어져있는 감성의 원천으로서의 기억을 불러 모은다. 정혜련은 아득히 먼 과거의 기억에서부터 가까운 과거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두뇌가 정렬해놓은 기억의 낱낱을 질서가 아닌 혼돈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요컨대 그는 과거의 기억을 정연한 질서의 세계로 얽어내기보다는 파편화한 혼돈의 세계로 흩어놓는다. 우리의 기억이 실재를 재구성하는 기제가 아니라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이며 환상 기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